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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건-비단구두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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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건-비단구두

피아니스트 임인건이 30년 만에 새롭게 공개하는 뉴에이지 피아노 솔로 앨범 [비단구두 1989-2018]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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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건-비단구두

가끔씩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 가사를 되뇔 때가 있다. 섬집아기, 오빠 생각, 클레멘타인…. 그때는 잘 몰랐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만큼 슬픈 노랫말이 또 없다.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이것이 한국인의 내면에 깔려있는 공통의 정서라고 생각했다. 동요 [오빠 생각]과 소설 [소나기]는 그에게 특히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 처연한 정서를 자신의 첫 앨범 [비단구두]에 녹이기로 했다. 



성우 김세원이 진행하던 라디오 [밤의 플랫폼]을 매일 기다리던 소년 임인건이 있었다. 좋아하는 김민기와 조동진의 노래가 언제나 나올까 기다렸다. 김민기와 조동진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음악이 품고 있는 서정성이나 철학적인 면은 임인건 음악의 정체성이 되었다.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 포크 음악의 서정과 오빠를 기다리는 그리움의 정서를 더해 서른의 젊은 피아니스트 임인건은 [비단구두]를 완성했다. 녹음을 마치고 음반 뒤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돌아오지 않은 오빠를 대신해서 이 비단구두를 드립니다."


1989년의 임인건은 젊고 재능이 넘치는 피아니스트였다. 클럽 야누스의 피아니스트로 재즈 1세대와 함께 연주했고, 어떤날 2집에 참여해 [취중독백]에서 멋진 스윙을 들려주기도 했다. 임인건, 조동익, 이병우 같은 새로운 연주자들이 1990년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방의 빛'의 베이시스트이자 기획자였던 조원익은 임인건에게 피아노 솔로 앨범을 제안했다. 당시 한국에선 조지 윈스턴의 [December]가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형식의 음악이라면 한국 시장에서도 가능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창작 피아노 솔로 앨범인 [비단구두]가 만들어졌다.

거의 30년 만에 새롭게 공개하는 [비단구두 1989-2018]은 일종의 리마인드 앨범이다. 기존의 [비단구두]는 절판 돼 더 이상 구할 수 없고, 음원 사이트에는 불안정한 사운드의 연주가 공개 돼있는 상태다. 마스터 테이프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임인건은 아예 연주를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나에겐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행보처럼 느껴졌다. 가령 알프레드 브렌델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1960년대와 1970년대, 그리고 1990년대, 모두 3차례 녹음했다. 1955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글렌 굴드는 1981년 녹음으로 또 한 번 이정표를 남겼다.

세월의 흐름만큼 각각의 버전은 모두 다르게 들린다. 타건도, 속도도, 호흡도 다 다르다. 물리적인 육체의 변화도 있을 것이고, 그 음악을 생각하는 마음도 태도도 조금씩은 바뀌었을 것이다. 1989년의 [비단구두]와 2018년의 [비단구두]도 그만큼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속도와 호흡이다. 앨범의 수록곡은 모두 1989년 버전보다 연주 시간이 길어졌다. 조동진의 [언제나 그 자리에]는 거의 2배 가까이 연주 시간이 늘어났다. 이를 세월만큼의 깊이라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임인건은 더 깊어진 호흡으로 건반 하나하나를 누른다. [꿈의 작업]에서 조원익의 베이스 연주 대신 이원술이 활로 연주한 더블베이스 연주도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다. 

이런 변화를 제외한다면 1989년 반짝이던 임인건의 재능이 그대로 담겨있다. 애초 앨범은 기존 가요의 연주로 꾸밀 계획이었다. 하지만 임인건의 창작곡을 듣고 방향이 바뀌었다. 김민기의 [작은 연못]과 조동진의 [언제나 그 자리에]를 빼고는 모두 그가 만든 곡으로 채웠다. 김민기와 조동진의 음악이 그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끼친 걸 생각하면 그의 근원과 같은 정서가 앨범 전체에 녹아 들어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정서를 잔뜩 머금고 재즈만큼은 아니어도 연주의 기술적인 부분을 더해 앨범을 완성했다.

새삼스레 곡들의 제목을 써본다. 그리고 그 후에, 눈 오는 저녁, 비단구두, 무덤 앞에서, 오래된 우물, 진달래……. 내가 좋아하는 임인건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의 세계를 피아노로 그리고, 그 세계는 그가 앞서 얘기한 한국적인 공통의 정서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경험을 한 사람끼리 통할 수 있는 서정의 세계다. 그 세계의 시작이 [비단구두]였다는 걸, 그리고 그의 음악의 근원이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대로라는 걸 [비단구두 1989-2018]을 들으며 다시 한 번 느낀다. 여전히 그립고 아름다운 세계다.

-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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